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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역사적 배경/해석] 노랑:죽음의 바다 리뷰_왜 이순신은 북을 쳤을까?

영화 리뷰

by 주요 증권 정보의 Alex 2023. 12. 27.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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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영화 리뷰는 작성자 본인의 생각으로 제작된 글이며,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참고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노랑:죽음의 바다 포스터

 

노량: 죽음의 바다
이순신 3부작의 마지막편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2023)은 김한민 감독이 제작한 명량(2014), 한산(2022)을 잇는 임진전쟁 당시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담은 3부작 영화의 마지막 작품이다.

 

오늘은 노량: 죽음의 바다를 보시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여러가지 역사적 배경과 함께 영화에 대한 해석을 덧붙여볼까 한다.

노랑: 죽음의 바다
임진왜란은 왜 일어났을까?
언제? 어디서? 왜?

 

우선 임진전쟁은 1597~1598년 7년간 조선과 일본이 벌인 총력전으로 임진왜란과 화의 기간, 97~98년의 정유재란을 통칭해서 임진왜란이라고 많이 부른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일본은 전국의 다이묘들에 의해서 통일된 국가 권력 기반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던 상황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8년 전국을 통일하고 정이대장군(쇼군)직에 오르게 되면서 내부적인 통일이 완성된다.

 

하지만 2대 세력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무장세력인 사무라이들의 내부적인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을 해결하고자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 정설로 자리잡혀 있다.

임전전쟁 당시 부산진 순절도

 

노량해전은 언제 벌어졌을까?
정유재란의 종점, 노량해전

 

위와 같은 이유로 발발한 임진왜란에서 노량해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이 패퇴하던 정유재란 말기에 벌어진 해전이다. 전쟁 초기 빠른 진격 이후 서울에서 해군 보급을 받는다던 일본의 계획은 한산도 해전을 통해서 무력화되었으며 육지에서의 승전도 명군 참전 이후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하며 일본군은 경상남도 해안 지역까지 후퇴하고 '왜성'을 지어 농성하게 된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내의 정쟁이 가속화되면서, 일본군은 빠른 종전과 회군을 원했으나 이순신은 조선 땅을 다시 넘볼 수 없도록 압도적인 승리로 종지부를 찍고자한 전투가 바로 노량해전이며, 조명 연합함대와 일본 함대 임진전쟁 당시 최대 규모의 해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노량: 죽음의 바다 갑판 백병전
노량: 죽음의 바다 스토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경상남도 순천, 사천, 울산 왜성에 고립되게 된 일본군 그 중 조선반도를 가장 끈질기게 괴롭히고 열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고립되게 된다. 허나 조명연합 육군은 일본군의 휴전 협상을 핑계로 공격하지 않았다.

고니시는 휴전기간 동안 조명 연합 함대의 명 수군도독 진린에게 거액의 청탁을 하여 탈출을 꾀하고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증원을 요청한다.

명 수군 진린 도독
 
탈출하는 척 진린을 속이고 조선 수군을 함락시킬 계획을 전달받은 시마즈 요시히로는 휘하 6만명의 병력과 500여대의 함선을 가지고 순천을 포위 중인 조명연합함대에 찾아가게 된다.
고니시의 협공 요청을 받은 시마즈 요시히로
 
하지만, 해당 정보를 파악한 이순신은 고니시와 시마즈를 동시에 상대할 수 없어, 각개격파를 위해 고니시의 눈을 속이고 조명연합함대를 이끌고 적이 올 좁은 해협인 노량에서 진을 치고 관음포로 적을 몰아 섬멸할 계획을 세운다.
이순신과 부장들
노량: 죽음의 바다 결말 및 해석

 

이미 거액의 청탁을 받은 명나라 함대는 퇴로만 막은채 구경 하게 되고, 조선수군만 시마즈의 500척 함선을 상대로 격전을 벌이게 된다. 전투가 너무 격렬해지자 진린 역시 자신이 속은 것을 깨닫고 명함대를 이끌고 왜군을 가로막게 되고 탈출하려는 왜군과 단병접전을 벌이게 된다.

함상 백병전투 장면
 
하지만 되려 혼전 속에서 진린도독은 위기에 처하게 되고, 오히려 이순신 휘하의 항왜 준사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게 된다.
전투 중 갇힌 진린 도독
진린을 구하러 간 준사

이후 조명연합함대와 시마즈의 왜군은 서로 월선하며 백병전을 벌이게 되며, 이순신은 혼전 속에서 죽어간 영혼을 떠올리다, 북을 울리며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한다. 이에 조명수군은 의기 투합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머쥐게 되지만 노출된 상태로 북을 치던 이순신은 갈비뼈부터 관통당하는 총격을 입고 누구나 아는 명언을 남긴다.

싸움이 급하다. 단 한명의 조선수군도 동요되어서는 아니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고니시는 뒤늦게 전투가 한창인 관음포의 지척까지 왔지만, 일본 해군이 격파당한 모습을 보며 회군하게 된다.

 

왜 이순신 장군은 북을 쳤을까?
군사적 이유와 영화적 이유

 

실제 군사적으로 북을 친 제일 큰 이유는 과거 전투의 명령 신호 체계가 '북소리'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무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낮에는 '깃발' / 저녁에는 '불'로 소통했는데요. 낮, 밤, 전투시 모두 활용된 것이 바로 '소리'였습니다.

 

난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는, 깃발과 불을 쳐다볼 시간이 없어 '북', '나팔', '꽹가리'와 같은 수단을 통해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이에 북소리는 사령부가 살아있다는 신호이자, 명령 체계가 살아있다는 의미로 전투에서 전의를 상실하지 않는 역할해주었습니다.

 

영화적인 의미로는 한산도-명량-노량해전을 거쳐오면서 수없이 희생되어온 순국선열들의 기운을 담아, 다시는 왜란과 같은 무의미한 전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자하는 이순신의 강렬한 염원이 당긴 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 사료에서도 전투 중 전사했다는 이야기와 북을 치다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양립하며, 북을 치다 죽었다는 것이 좀 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 죽음에 관한 썰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시면서 대한민국 역사에서도 영웅적인 인물 서사시로 각망받고 있습니다. 전투 중 사망한 것이 정설이지만 종종 나오는 주장이 몇 가지 있는데, 제일 유명한 썰을 하나 공유드리려고 합니다.

 

임진전쟁 당시, 이순신 장군에 대한 백성들의 선망이 높아지면서 선조와 대조신료들이 이순신을 경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내에서 보여지듯이 이미 한양은 전후 정쟁과 논공행상에 대한 준비가 한창이었으며, 서애 류성룡조차 전후 조선 수군을 광해군쪽의 지지세력을 활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전쟁 이후 국왕보다 백성에 총애받는 신하는 역모죄로 죽을 것을 염려하여 죽은 것으로 위장했다는 장난 같은 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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